전혜린 추모의 글

2023. 3. 25. 15:08좋은글

 

[전혜린 추모의 글 ]

 

전설이나 신화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있다. 전혜린---그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어둠이 깔리는 박명(薄明)의 층계(層階)위에서 그 여자는 기다리듯이 서있다. 그에게 다가가는 이는 그 여자가 얼마나 낯설은 얼굴 속에서 놀라움의 눈을 뜨는 가를 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손님>인 것이다.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항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서서히 친근해지는 그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무엇인가를 향하여 타고 있는 그의 눈은 모든 의미를 말하려고 한다.

 

그는 끊임없이 말한다. 그는 모든 얼굴을 향하여 정면으로 질문한다. 그는 이미 [손님]이 아니며 낯설지 않다. 어둠은 경이(驚異)로 열리고 그의 목소리는 당신의 가슴 속에서 아늑하게 울리며 긴 여운을 남긴다.

 

아니다.그의 목소리는 나직나직하게, 그러나 그 속에는 걸잡을 수 없는 분류를 담고 있다. 그의 내부에서 끈덕진 열을 뿜으며, 모든 습관의 예복과 미지근한 생의 소도구들을 불태워버리는 그 광기로써 그는 당신을, 아니 자기자신을 보석과 같은 순간의 빛 속으로 해방한다.

 

그의 의식이, 그의 언어가 집요하게 떠밀고 가는 순간의 지속-그것이 바로 그녀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귀한 선물이다.그는 끊임없이 동요하며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보도 위에서 먼 곳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남몰래 훔쳐 보았다. 그의 눈은 쉬지 않고 인식을 향하여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를 보고 왔다. 그래서 그는 서울의 거리에서도,뮌헨의 카페 앞에서도 [손님]이었다. 그리하여 여자는 행복하기를 거부했다.

 

그 여자는 짧은 생애를 가득한 긴장 속에서 살기 위하여 끊임없는 욕망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누구보다도 가난했다.그는 하나의 활화산이었다. 이 토지에 살고간 서른 두해, 자기의 생을 완전하게 산 여자였다. 가짜가 아닌 생이었다. 생을 열심히 진지하게 살았다. 정말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오늘의 침묵에 이르기 위하여 언제나 말을 했고 언제나 노상에 있었다.

 

당신은 이제 알 것이다. 그가 도달한 침묵의 값을.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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