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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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노래(Lied vom kindsein) / Peter Handke' - 베르린의 하늘(Der Himmel über Berlin)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2024.04.11 -
홀로서기 - 바람아래해변 - 태안군 - 충남
홀로서기 / 서정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에 한쪽을 위해 헤매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에 아무..
2024.01.06 -
동행 / 이정하
동행 / 이정하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우리 삶에 따스한 것은 없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혼자였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기대고 싶을 때 그의 어깨는 비어 있지 않았으며 잡아 줄 손이 절실히 필요했을 때 그는 저만치서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산다는 건 결국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틀거리고 더듬거리더라도 혼자서 걸어가야하는 길임을, 들어선 이상 멈출 수도 가지않을 수도 없는 그 외길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아마, 그것처럼 내 삶에 절실한 것은 없다
2023.10.09 -
늙어가는 길 / 윤석구
늙어가는 길 / 윤석구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 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 가는 이 길은 너무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 두리번 찾아 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 발 한 발 더디게 걸으..
2023.10.08 -
땅끝 / 나희덕
땅끝 / 나희덕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2023.10.01 -
균 열(龜裂) / 김민부
균 열(龜裂) / 김민부 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 배 곯은 바위는 말이 없어 할 일 없이 꽃 같은 거 처녀 같은 거 남 몰래 제 어깨에다 새기고들 있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눈 먼 사투리는 밤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푸른 달빛 없는 것, 그 어둠 밑에서 흘러가는 물 소리 바람 불어……, 아무렇게나 그려진 그것의 의미는 저승인가 깊고 깊은 바위 속의 울음인가 더구나 내 죽은 후에 이 세상에 남겨질 말씀쯤인가
202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