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0월 15일의 일기 / 전혜린

2023. 3. 25. 15:28좋은글

깊은 가을-바람, , 그리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첫번 석탄을 샀다. 따뜻한 속바지와...... , 따근한 군밤을 파는 할아버지의 구루마가 레오폴드가(Leopoldstrasse) 에 보일 것이다.

 

새빨간 사과가 4파운드에 85페니, 버터, 배가 3파운드에 85페니, 레기나 포도가 2파운드에 1마르트 10페니......올해는 실과의 풍년이다.

 

결혼이란 확실히 인간을 좁힌다. 벽난로 앞의 단란과, ..주의 안정과, 안락 이외에 아무 엠비션도 안 남기고 만다.

둘만의 평안과 행복,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남기고 만다.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인류의 미래, 원자(Atom), 비행기, 달 로켓, 대만이 앞날, Papst의 서거......

이 모든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을 가깝게 스쳐 지나가 버리고 아무것도 안남기고 만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결코 자랑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쿠션 위에 길게 몸을 펴고 누워 있고 싶어하는 고양이의 본능 이외에 무엇이랴!

이기(Ego)- 여자의 작고 비소한 이기심- 날카로운 손톱과 교태.

자기 자신에게도 교태와 분장 없이는 허할 수 없는 비본질적인 존재가 여자다.

여자의 생은 모방이지, 참 생() 아니다.

여자는 자기를 잊을 수도, 초월할 수도 없으므로 위대함에는 부적당하다.

커다란 우(), 위대한 무심, 부작위가 너무나 여자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생활에의 작은 기술에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참과는 더 멀어지고 본질을 등지게 되는 것이 여자다.

따라서 위대한 사랑조차도 여자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기를 타인 속에 초극하고 또 세계 속에 초극해 가야 하는 것이 참사랑이라면,

여자는 사랑에는 너무 본능이 앞서는 종족인 것 같다.

나 자신 속에서 발견한 여자가 나를 절망케 한다.

 

일생에 한번, 한 개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 살아나간다. 모래를 씹는 것 같은, 또는 폭풍우가 아프게 뼈까지 때리는 것 같은......, 그러나 때로는 은빛 안개에 잠긴 낙엽에 갈린 아침길과 같은, 또는 파란하늘에 둥둥 분홍 구름이 떠 있는 황혼과도 같은......

이런 여러 개의 수많은 순간들로 구성돼 있는 나의 삶은 결코 쉽지만도 또는 즐겁지만도 않다.

그러나 나는 이제 죽음을 부르게 할 생각은 없다.

싹이 트고 있는 나무의 기둥처럼 나의 몸에는 생의 의지, 아니 단순한 생이 시작되었다.

 

밤에 문득 달 로켓을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언제까지든 실패하기를 빈다.

영원히 도달할수 없고, 또 침묵에 갇혀 있는 달이기 때문에 이처럼 사람들이 동경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저 차가운 은빛의 월광(月光), 창백한 얼굴의 달을 보라.

나에겐, 그리고 누구에게도 영원히 신비롭게 남아 있어 주길!

과학이란 쓸데 없는 간섭을 하고 기계를 주무르며 인간의 꿈을 파괴하고 만다는 대명사인가!

나는 알고 싶지도 않다.

달나라에 가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리워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꿈을 갖고 싶다.

 

전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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