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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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 나희덕
땅끝 / 나희덕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2023.10.01 -
균 열(龜裂) / 김민부
균 열(龜裂) / 김민부 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 배 곯은 바위는 말이 없어 할 일 없이 꽃 같은 거 처녀 같은 거 남 몰래 제 어깨에다 새기고들 있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눈 먼 사투리는 밤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푸른 달빛 없는 것, 그 어둠 밑에서 흘러가는 물 소리 바람 불어……, 아무렇게나 그려진 그것의 의미는 저승인가 깊고 깊은 바위 속의 울음인가 더구나 내 죽은 후에 이 세상에 남겨질 말씀쯤인가
2023.10.01 -
주유소 / 윤성택
주유소 /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2023.09.30 -
돌탑 - 변산반도국립공원 - 부안군 - 전북
돌탑 / 고미숙 누구의 소원일까차곡차곡 쌓여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돌은불안한 소원이 되어가장 낮은 곳에 있는 돌은소원을 받쳐주는 소원이 되어탑을 이루고 있다 소원이 깃들어 있지 않는돌도 한 개 끼어 있다 돌의 마음이 무거울까봐아무런 소원 없이내가 올려놓은납작 돌 한 개
2023.09.09 -
엽서를 태우다가 / 이외수
엽서를 태우다가 / 이외수 지난 밤 그대에게 보내려고 써 둔 엽서 아침에 다시 보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성냥불을 붙였다 끝까지 타지 않고 남은 글자들 외 로 움
2023.04.08 -
친구를 보내며 / 이백
靑山橫北郭白水遶東城此地一爲別孤蓬萬里征浮雲遊子意落日故人情揮手自자去蕭蕭班馬鳴 李白 청산횡북곽백수요동성차지일위별고봉만리정부운유자의낙일고인정휘수자자거소소반마명 이백 푸른 산은 성 북쪽에 비끼어 있고 흰 물은 성 동쪽을 싸고 흐른다 이 곳에서 한번 헤어지며는 쑥대같이 만리를 날리어 가리 뜬구름은 나그네의 마음인가 석양에 내 가슴은 한이 맺힌다 이제 손 흔들며 떠나려는가 가는 말도 쓸쓸한지 소리쳐 운다 이백
2023.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