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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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2023.03.05 -
행복 / 유치환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2023.03.05 -
한잎의 여자 / 오규원
한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詩集)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같은 슬픈 여자
2023.03.05 -
沙平驛(사평역)에서 / 곽재구
沙平驛(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
2023.03.02 -
쓴맛 / 천양희
쓴맛 / 천양희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잘 구별되지 않고나팔꽃과 메꽃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가 잘 구별되지 않고미모사와 신경초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개와 는개가 잘 구별되지 않고이슬비와 가랑비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가리와 두루미가 잘 구별되지 않고개와 늑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고잡념 없는 사람과 잡음 없는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평생을 바라 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럴까구별 없는 하늘에 물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쓴맛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지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대답처럼 떨어졌습니다
2023.02.16 -
패러독스(역설) / 김용호
패러독스(역설) / 김용호 *그리하여 내 사랑은 영원히 유폐(幽閉)의 운명을 등에 지고 뻗을 곳 없는 내 정열은 우울의 화석(化石)이 되고 말았다.* 극과 극은 그렇게도 멀었고 극과 극은 그렇게도 가까웠다 언어의 파라독스를 하나의 진리로서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불행으로 생각지 않는다 회오리바람이 뜨거운 정열을 몰아 그를 껴안을 기회를 갖다 주었어도 이성의 차디 찬 단념의 칼날은 끝내 그이의 행복을 뺏지 않았다 그이의 행복이란 모든 것에 가난한 내 앞을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최후의 이 자리에서 뒤끓는 심장의 고동을 땅 위에 꽂았다 새파랗게 질린 내 입술은 잠자리 날개처럼 떨렸으나 다음의 말은 뼈아프게 똑똑히 하였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2023.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