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약속

2023. 3. 4. 05:57자작글/산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재수끝에 겨우 대학에 합격하여 대학생의 지상 최대의 자유와 행복한 시간을 누리고 있을때 한동안 나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었던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시절엔 2학년때까지는 교양과목을 이수해야 하는 시기였기에 단과 대학별로 수강신청을 하여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필자가 강의를 듣던 강의실 옆 강의실에 보기만 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의 신선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 비타민-C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여자아이를 보게 되었으며 나는 그만 그아이에게 필이 꽂히고 말았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였으면서 캠퍼스에서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나게 되거나 강의실 복도에서 그 아이만 나타나면 왜그리 가슴이 설레고 진땀이 나고 그랬던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아이는 적어도 나에게는 내 영혼까지도 유린하곤 했던 시쳇말로 여신과도 같은 존재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숫기가 부족하여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말한마디 붙히지 못하고 그저 먼발치에서 그아이를 바라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을 하면 이루워 질수 있다는 말처럼 내가 그 아이와 만나 말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대학2학년때의 겨울이였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해 겨울은 정말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그 시절엔 데모가 많아 휴강을 많이 했던 관계로 방학중에 레포트를 제출해야 했었는데 레포트를 제출하기 위해 학교에 나왔다가 배가 고파 잠시 학교앞 제과점에서 빵을 사먹고 있는 중에 그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건축과지....!!!"

"그래,,,넌 체육과?"

",,,,"

"레포트때문에 왔어.."

",,근데 레포트가 엉망이라서 제출하기가 그러네.."

"내가 봐줄까,,"

"그래,,,좀 바줄래.."

"참 난 XX이라고 해 임XX,,,,"

",,XX야 성은 김이고......"

'반갑다,,XX,,,같은 학년이니까 반말해도 되지.."

"그럼,,당연하지,,"

 

이렇게 시작한 우리들의 운명같은 만남은 그 아이앞에서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려 급식욕을 잃은 바보같은 내가 남겨진 빵을 우유화 함께 억지로 먹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과 함께 이어졌으며 빵을 모두 먹은후 학교에 레포트를 제출하고 학교 가까이에 있었던 명동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그리곤 내가 잘가는 단골 락카페이기도 한 맥파이 하우스라는 곳에서 레드 제프린의 음악을 들으며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비타민-C 처럼 신선했고 밝은 미소를 지니고 있던 그애의 겉모습과는 달리 그아이에게 어두운 그늘이 깔려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아이에겐 이미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아이와 나는 게의치 않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명동거리를 배회하다가 명동성당근처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집에 가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퇴계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그 아이는 조금 떨어져서 길을 걷고 있던 나를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였다.

 

"너 참 좋은애구나,,,우리 10년후에 첫눈 내리는날 만날래,,,30살때...."

",,,,..."

"암튼,,,일단 약속은 하자....그때 우리 만나기로 해..."

",,,,,,"

"우리 약속한거다. 절대 잊지마 알았지,,,"

"....."

 

그리곤 그아이 특유의 쾌활하고 예쁜미소를 남기고 동대문행 버스를 타고 가버렸는데 나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려오는 버스정류장에서 그아이를 태우고 멀어져가는 버스의 뒷꽁무니만 한없이 바라다 보고 있었던거 같다.시간이 지나 개학을 했고 다시 학교에 갔을땐 그아이는 캠퍼스든 강의실이든 그어디에서든 모습을 볼수 없었다. 그아이와의 꿈같았던 만남은 계획도 없이 우연히 벌어졌던 일이였기에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마음으로만 안타까워 하거나 궁금해 하다가 나 또한 얼마후에 군대에 가게 되었으며 그아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갔고 어느날 나는 '비포 썬 라이즈'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학창시절 비타민C와의 첫눈내리는 날의 우연한 만남이 꿈결처럼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버렸으니까 그 아이는 지금쯤 한갑이 내일모래인 중년의 초짜 할머니로 이세상 어디에선가 나처럼 살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살아생전엔 다시는 만날수 없는 아이겠지만 그 아이에게 물어보고 싶다.

 

"너 그때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했던 말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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