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박사생가 - 문덕면 - 보성군 - 전남

2026. 6. 29. 05:36국내여행/전라도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내길 18-35에 위치하고 있는 서재필박사 생가는 서재필 선생의 외가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지금은 복원이 되어 잘 관리되고 있지만 내가 이곳을 방문했던 2017년도에는 보존상태가 그다지 양호하지는 않았던거 같다. 지금이라도 관리가 잘되어 있다니 다행이다.

서재필박사는 외가집이였던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 지금의 가내길 18 - 35 이곳에서 태어났다. 7세에 서울에 올라와서 외숙의 집에서 공부하다가 14세 때에 왕이 친히 보이는 전시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김옥균을 알게 되어 그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김옥균의 주선으로 1883년 4월에 일본의 호산육군학교에 유학하여 이듬해 5월에 귀국해서 김옥균과 함께 사관학교를 설립하려다 수구파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김옥균·박영효·박영교·서광범·홍영식 등과 함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켜서 신정부의 병조참판과 정령관을 맡았으나, 청국의 군사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정부가 망명객들을 박해하자 1885년 4월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고학으로 죠지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암스트롱양과 결혼하여 미국에 귀화하였다. 죠지 워싱턴대학에서는 병리학 강의를 맡았으며 세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94년 7월에 본국에서 갑오경장 추진내각이 수립되어 갑신정변 때의 정변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고, 옛 동지인 박영효가 1895년 미국을 방문하여 그의 귀국과 외부협판직의 담당을 요청하자 조국의 개화독립에 봉사하기 위하여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정세를 관찰해 보고는 입각하는 것보다 국민계몽운동을 하는 것이 더 필요함을 절감하고 입각을 거절한 다음 개화파의 도움을 받아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은 한문을 모르는 민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① 국문전용, ② 국문 띄어쓰기, ③ 쉬운 국어쓰기의 방법으로 발행되어 시대에 맞추어 국민의 독립사상 형성과 개명 및 진보에 큰 공헌을 했으며,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의 효시가 되어 그 후의 한국 신문과 언론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독립협회는 그 첫 사업으로 종래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을 세웠으며, 종래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