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2025. 12. 8. 23:58자작글/자작글

 

125일 저녁무렵 첫눈이 내렸다. 어둠속에서 첫 눈이 내리기는 했지만 먼지처럼 날리는 눈이 아니라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이였기에 기분은 참 좋았던거 같다. 기후변동때문인지 십수년동안 눈다운 첫눈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날의 첫눈은 나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고 그래서일까 잠시 여린 감성에 젖어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도 들었다.

 

눈내리던 시간이 퇴근시간과 겹쳐서 비록 승용차안에서 첫눈을 만났지만 차창밖으로 펑펑 내리던 첫눈을 바라다보고 있으려니 문득 50년전의 약속 하나가 떠오르기도 했다. 대학시절 졸업을 앞둔 종강파티에서 누군가가 술에 취해 10년후 첫눈이 내리면 서울역 시계탑앞에서 꼭 만나자는 약속을 남겼는데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잊혀지지 않고 머리속에 떠오르곤 했다. 어느땐 미친척하고 서울역 시계탑앞으로 달려가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단 한번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거 같다.

 

돌아보면 나의 유년시절엔 겨울만 되면 정말 많은 눈이 내렸다. 그 시절 아침 일찍 학교에 가는 길목에도 밤새 쏟아져 내린 눈때문에 장화를 신고 학교에 가야할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으며 어느땐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밟는 소리를 들으며 마냥 좋아하며 신기해 했던 기억도 난다. 눈내리는 날 우리들의 세상은 동네 강아지들과 아이들의 천국이었던 거 같다.

 

그 시절엔 겨울이면 날씨가 정말 추웠다. 엄마가 뜨게질로 만들어주신 털실 벙어리 장갑속에서도 추위에 꽁꽁 얼어버린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 녹이며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고 눈밭에 대자로 눕기도 하면서 그렇게 하얀눈과 함께 하루종일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유년시절을 제외하곤 눈에 대한 기억이 몇개를 제회하곤 별로 없는거 같다. 군대시절에도 눈이 많이 내렸는데 하필 눈이 금요일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비상이 걸려 주말 외출외박이 중단이 되어 열불이 터지곤 했다, 그 넓은 연병장을 눈가래를 동원하여 우리들이 직접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눈을 치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눈치우는 일이 장난이 아니다. 중노동이 따로 없을만큼 정말 힘든 작업이기도 했다. 아무튼 치워도 치워도 치워지지 않던 강원도의 눈은 정말 대단했다. 그때 처음으로 눈에 대한 낭만이 사라지고 강한 거부감과 함께 눈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30대 중반쯤 천안 동면이라는 곳에 있었던 건설현장의 현장소장을 하고 있을때 눈내리는 길을 달리다 대형 교통사고를 일으켰던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그날은 나와 함께 근무하던 김기사라는 친구의 여자친구가 청주에 있던 대학의 졸업식을 하는는 날이였다. 그때 초보운전이었던 그녀석이 차를 빌려달라고 하기에 폭설도 내리고 더더욱 초보운전 딱지를 떼지못한 상태라 불안해서 힘들지만 내가 운전을 해야할 것 같아서 운전을 대신 해주기로하고 유관순기념과 뒷 길인 비상도로로 달려 청주에 있는 대학교를 가던 중 아차하는 순간에 그만 눈길에 미끄러져 10m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폐차수준의 큰 사고에 비해 다행히 차에 타고 있던 나와 김기사 두사람은 전치 1주정도의 타박상만 입었을뿐 크게 다치지 않았기에 꺼꾸로 쳐박힌 차량에서 어렵게 빠져나와 개미한마리 볼수 없었던 충청도 동면의 시골길을 하염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함박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 멀고도 먼 눈길을 걷고 또 걸어 현장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사고로 인해 녀석의 여자친구의 졸업식에는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또한 내 의식속에는 눈길 운전에 대한 두려움의 트라우마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눈에 대한 나쁜 추억도 있지만 아름다운 수채화 같은 추억도 있다. 시쳇말로 고무신 거꾸로 신었던 여자친구가 전역을 몇달 남겨둔 제대말년쯤에 면회를 왔었다. 하필 그날 내가 근무하던 부대가 있던 강원도 원주에는폭설주의보와 함께 하루종일 함박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 나의 면회소식으로 인해 부대는 벌컥 뒤집어 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때 나는 부대내 비상 5분대기조의 선임하사로 24시간 의복은 물론 워커조차도 벗지 못하고 전시를 위한 비상5분대기조를 이끌고 있었던 터라 면회를 와도 외출외박을 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신임하시던 육사출신 대대장님의 특별지시로 행정과장은 오분대기조 선임하사직책을 타중대의 부사관으로 교체 명령을 낸후에야 행정과장전용 짚차를 타고 함박눈이 펑펑내리던 눈길을 달려 시내로 외박을 나올수 있었다. 그때 면회를 왔던 여자친구가 지금의 내 아내고 무남독녀 외동딸 내 딸아이의 엄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쩔수 없이 겪게 되었던 그런일들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그 모든 일들이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지금까지 잘 살아올수 있도록 나의 삶을 건강하게 지탱시켜준 주춧돌 같은 일들이지 않았나 싶고 그때의 일들이 내생의 화양연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아름다운 영화속의 한장면처럼 잊혀지지 않고 이토록 선명하게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듯 싶다.

 

며칠전 첫눈이 내렸다. 내린 눈이 적어 그늘에 쌓인 눈을 빼곤 따사로운 겨울햇살에 모두 다 녹아버렸지만 첫눈도 내렸으니 이제 나도 마음 단단히 먹고 겨울채비를 서둘러야 할거 같다.

 

첫눈이 온다구요 / 이정석

슬퍼하지 마세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

그때 옛말은 아득하게 지워지고 없겠지요

 

함박눈이 온다구요 뚜렷했었던 발자욱도

모두지워져 없잖아요 눈사람도 눈덩이도

 

아스라이 사라진 기억들 너무도 그리워 너무도 그리워

옛날 옛날 포근한 추억이 고드름 녹이듯 눈시울 적시네

 

슬퍼하지 마세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

그리운 사람 올 것 같아 문을 열고 내다보네

 

https://youtu.be/MLfbwWTFPzk?si=LSMU9e7l54--b8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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