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 신리성지 - 합덕읍 - 당진시 - 충남

2024. 5. 20. 21:21가톨릭

 

신리성지는 충남 합덕읍에 있는 순교성지다. 1794 12월 중국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의 도움을 받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선교를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가 국내에 들어오게 되면서 정순왕후,조만영, 대원군과 같은 권력자들이 권력다툼의 희생양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서양 세력과 결탁하여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벌린 신유박해(1801),기해박해(1839),병오박해(1846),병인박해(1866)에 의해 이승훈신자, 김대건신부 최양업신부 같은 분들과 선교를 위해 이땅에 왔던 많은 외국인 신부들과 수를 헤아릴수 조차 없이 많은 무명의 신자들이 비참하게 순교를 하고 말았다. 

 

이 신리성지도  성 다블뤼 안토니오, 성 손자선 토마스, 성 오매트르 신부, 성 황석두 루카, 성 위앵신부 외 많은 무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참고로 신리성지가 있는 신리는 천주교 탄압기의 가장 중요한 교우촌이였다. 이곳은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 마을이었으며,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의 천주교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곳은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교회)로 불리기도 한다.

 

1845 10월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에 첫 걸음을 내디딘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을 한 제5대 조선교구장이기도 한 다블뤼 주교가 신리에서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잘 발달된 삽교천 수계를 통해 중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긴밀히 연결될 수 있었던 점과 내포지방의 문화적 개방성 때문이라고 판단되고 있다.

 

순교성지인 이곳엔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손자선 토마스는 독실한 신자였으며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아침과 저녁의 기도를 절대 거르지 않았다. 그의 가정 생활은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문의 깊은 신앙을 반영했으며 그 자체가 신앙 고백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고 며칠 뒤 포졸들이 손자선 토마스가  살고 있는 마을을 급습하였다. 그들은 천주교인들의 가산을 약탈하였다. 이때 손자선은 덕산의 관아로 가서 약탈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관장은 반환은 커녕 배교를 요구했고 손자선 토마스는 거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저는 죽는 것이 무섭지만, 저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손자선은 체포되었고 가혹한 고문을 받은 상처가 커서 죽음 직전일 때도 손자선 성인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오셔서 저를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견디어냈다고 한다. 그후에도 손가죽을 스스로 물어 뜯으라고 강요하는 등의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배교를 거부하다 사형선고를 받고 23세의 나이로 순교하고 말았다.

 

손자선 토마스는 1968106일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 19845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