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24. 09:04ㆍ창작사진/궁 사찰 고건축 유물 유적
청동기 시대는 신석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중간쯤의 시대를 말한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을 말한다. 철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높은 온도로 연금을 할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다. 농사짓는 데 쓰이는 농기구는 계속해서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다. 돌도끼 · 홈자귀 · 괭이 따위로 땅을 파고 씨를 뿌렸다. 특히 바퀴날 도끼는 밭을 가는 데 쟁기처럼 쓰였고, 가을에는 낫처럼 이삭을 자르는 데 쓰인 반달 돌칼로 추수를 했다.
청동기는 무겁고 단단하지 않아서 농기구를 만드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청동기 시대에도 여전히 석기 농기구를 이용했다.
청동기 시대에는 배산임수 지형에 집을 지었다. 뒤에 나지막한 야산이 있어서 겨울에 부는 차가운 북서풍을 막을 수 있고 집 앞에는 시냇물이 흘러 식수나 농업용수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완만한 구릉지에 몇 집이 모여 취락을 이루었다.
청동기의 전형적인 토기는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였으며 움악의 형태는 장방형(직사각형)이였고 창고 · 공동작업장 · 공공 의식 장소로 쓰였던 곳도 있었다.
농경이 발달한 청동기 시대부터는 여성과 남성의 일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밭을 가는 등의 힘든 농사일을 남성이 맡았고 여성은 집안일을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남성의 경제적인 지위가 점차 높아졌고,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가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밀집되어 취락을 이루며 함께 힘을 모아 농사일을 할 수 있도록 정착 생활의 규모가 커졌다. 부부가 중심이 되어 살기 좋은 주거용 움집은 4∼8명 정도의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였다.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개인의 재산이 생겨나므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나뉘게 되면서 계급도 생겨났다.지배층이 생겨나면서 평등사회였던 부족 사회보다 계급 사회인 군장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로서 지배층들의 무덤인 고인돌이라는 무덤도 생겨나게 되었다.군장이란 부족을 지배했던 사람을 칭하는 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등장하는 최초의 군장국가는 단군 왕검이 다스린 고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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