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노래(Lied vom kindsein) /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2024. 4. 22. 10:36좋은글

 

아이의 노래(Lied vom kindsein) /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 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 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 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 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뿐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 있다.

- 베르린 천사의 시로 알려져있는 베르린의 하늘(Der Himmel über Berlin)이라는 영화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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