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29. 17:43ㆍ좋은시
그해 겨울 / 유희경
그해 겨울 오랜 연애를 마감하였고 파란 사파리 점퍼를 사서 계절이 다 닳도록 입었다 즐겨 들었던 노래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몇 갑의 담배를 피웠고 끊을 수가 없었다 떨지 않았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해 겨울,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따금 전광판을 바라봤지만 나는 소식이 되지 않았다 이따금 生은 괜찮았다 이따금 새가 날았다 이따금 아는 사람을 만났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어디든 나는 나이를 둘러매고 갔다 췌장을 앓았다 받아온 약은 먹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멈추었다 겨울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다 필요 없어 보이기만 했으니, 만져보았던 글자들이 몸을 떨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늙은 개들은 언덕을 따라 올라가고 아이들은 여전히 달리기를 잘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내가 주운 종이는 구겨져 있었다 그 종이에 쓰인 것들 흔들리다가 쏟아져 모두 그해 겨울이었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했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질문뿐이었다 한 손을 번쩍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겨울은 언제나 다음에 찾아올 겨울을 기약하였다 영원한 작별은 불가능하거나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죽어 가고 있었다 구원은 도처에 있었으나 아무도 줍지 않았다 많은 문장으로 일기를 썼고 그보다 더 많은 문장을 지워 갔다 여전히 그만둘 수 없었다 이토록 질긴 것들이 무엇인지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으므로
과연 우리는 마땅한 것일까 자꾸 손을 숨겼고 그렇게 숨고 싶어 하는 손을 나는 늘 경계하였으나 손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갈 때 나는 그들의 이름을 생각하고 우리는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나를 감아올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자주 잠이 들었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밤도 있었다 그해 겨울 나는 그해 겨울을 포기하였고 동시에 모든 그해 겨울을 보고 싶기도 하였다 나는 안전하였다 그게 나를 무섭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 나는 불어왔다 불어 갔다 너무 멀리 날아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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