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락당 하립 삼의당 김씨부부 유지 - 마니산 - 진안군 - 전북

2024. 6. 23. 06:10국내여행/전라도

 

 

初夜唱和(초야창화) / 湛樂堂(담락당)

 

夫婦之道人倫始 (부부지도인륜시)

所以萬福原於此 (소이만복원어차)

試看桃禾詩一篇 (시간도화시일편)

宜當宜家在止子 (의장의가재지자)

 

부부는 일륜비롯

만복의 바탕이라

도화시 이 한편을 마음속에 새겨보오

왼집안 화목해야 온갖일 이뤄지리

 

화답의 노래 / 三宜堂(삼의당)

 

配匹之際生民始 (배필지제생민시)

君子所以造端此 (군자소이조단차)

必敬必順惟婦道 (필경필순유부도)

終身不可違父子 (종신불가위부자)

 

부부는 백성비롯

군자의 기본이라

공경과 순종함은 오로지 아내의길

남의뜻 종신토록 어기지 않으리오

 

담락당(湛樂堂)과 삼의당(三宜堂)은 마이산 기슭 마령면에서 200년 전 살았던 부부 시인이다. 삼의당은 여성의 이름으로 시문집을 출간하여 후대에 전한 희소성만으로도 그 존재 가치가 크다. 나아가 삼의당의 시를 통해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여성의 일상과 시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마의산 탑사를 오르는 중간쯤의 탑영제옆에 부부 재각인 명려각(明麗閣)과 높이 3.5m의 시비에는 부부가 결혼 첫날밤 서로 주고받은 담락당의 초야창화(初夜唱和)와 삼의당의 시 화답의 노래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초야창야(初夜唱和)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첫날밤에 신부와 함께 시조를 주고받으며 노래하던 풍습이다.

 

김 삼의당은 전북 남원의 서봉방에서 몰락한 사족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소학을 읽고 문자를 배워 제자백가를 섭렵했다고 한다. 스스로 글공부에 노력하여 여성으로서의 부덕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1786(정조10) 18세가 되던해에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출생한 담락당 하립과 결혼을 하였다. 본가와 시가 모두가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기 때문에 김삼의당은 남편 담락당의 과거급제를 평생소원으로 삼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가세가 더욱 빈한해지자 생활고를 면하기 위해 32세에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를 하여 죽을때까지 그곳에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