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선생 고택은 김정희의 증조부 월성위(月城尉)김한신에 의하여 1750년(영조 20)경 건립되었다. 고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안채 뒤로는 높은 축대를 쌓고 사당을 배치해 두었다. 주변은 사방을 담으로 둘러 두었다. 또한 수평으로는 개방적인 사랑채, 폐쇄적인 안채, 의례적인 사당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수직으로는 안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지다 마침내 사당에 이르러 일상의 공간과 단절되는 중층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길상사( (吉祥寺)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1997년에 세워져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요릿집)인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으로 유명한 곳이다.대원각 소유주 김영한은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했고, 군사정권 시절 대형 요정인 대원각이 됐다. 김영한은 승려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에게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고 절을 세워달라며 간청하였다. 법정은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결국 1995년 이를..
연등(燃燈)이란 등불을 밝힌다는 뜻으로, 불교에서는 등불을 달아 불을 밝힘으로써 무명을 깨치라 가르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며 귀의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불교에서 등은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으로, 어리석음과 어둠을 밝히는 의미로 지혜에 비유되었다. 이를 등공양(燈供養)이라 하여 향공양(香供養)과 더불어 중요시하였다. 또한 연등을 보면서 마음을 밝히는 것을 관등(觀燈)이라고 한다.
고창 삼호정은 옥천조씨 삼형제인 인호 조현동, 덕호 조후동, 석호 조석동이 1700년대에 지었고, 1864년에 중건한 정자로 5량가,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팔작집의 구조이다. 삼호정은 주변 경관이 우수하며, 조선 후기의 건축학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며 시를 쓰고 글을 읽으며 지냈던 당시의 유교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소로써 중요하다.
향교는 공자 등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건물 배치는 외삼문 없이 바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이외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제기고, 홍살문, 내삼문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태극은 천지가 개벽하기 이전의 상태로서 우주 만물 구성의 가장 근원이 되는 본체를 말한다. 태초에 우주가 생성될 때 태극이 생기고, 이 태극이 둘로 갈려져 하나는 음이 되고 하나는 양이 된다. 이 음양의 배합으로 하여 천지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변화, 생성되고 새로워져 발전과 번영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태극은 우주생성의 과정을 상징한 직관적인 문양으로, 신성과 신비의 부호로 사용해 왔으나 차츰 쓰이는 범위가 넓어져 신성보다도 길상(吉祥)과 축복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왕릉이나 열녀를 기리기 위한 동네의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에서 태극문을 찾아 볼 수 있다.
모양성의 동쪽 관문으로 등양루라고 불리우고 있다. 등양루의 옹성은 북문의 아름다움보다는 못하지만 높은곳에 있어 정취가 뛰어난 곳이기도 하다.
고창읍성은 적들이 성문에 직접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또는 항아리)으로 쌓은 3개 옹성(甕城)과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만들어 전시 공격은 물론 평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목적으로 활용 6개의 치(활을 쏘았을 때 살상 거리)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 판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 등 전략적 요충시설을 두루 갖췄다. 특히 성벽 몸통인 체성과 눈썹처럼 튀어나온 미석, 적의 화살로부터 피할 수 있는 여장, 적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총안 등 공격과 수비를 한 번에 할 수 있어 효율성을 높였다.평지성이면서도 야산을 이용해 축성한 고창읍성은 성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5,858m²(50,172평)로 성곽에는 주 출..
성문 밖에 반원형(半圓形)이나 삼각형으로 축성된 작은 성. 월성(月城)이라고도 불린다. 그 안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어 성문을 호위하거나 방어를 강화할 때 쓰였다
옹성(甕城)은 성문 앞에 설치되는 시설물로 모양이 마치 항아리와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옹성(甕城)은 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적이 아무리 많아도 옹성 안에 들어 올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군쪽에서 공격하기가 쉽다.
청동기 시대는 신석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중간쯤의 시대를 말한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을 말한다. 철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높은 온도로 연금을 할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다. 농사짓는 데 쓰이는 농기구는 계속해서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다. 돌도끼 · 홈자귀 · 괭이 따위로 땅을 파고 씨를 뿌렸다. 특히 바퀴날 도끼는 밭을 가는 데 쟁기처럼 쓰였고, 가을에는 낫처럼 이삭을 자르는 데 쓰인 반달 돌칼로 추수를 했다. 청동기는 무겁고 단단하지 않아서 농기구를 만드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청동기 시대에도 여전히 석기 농기구를 이용했다. 청동기 시대에는 배산임수 지형에 집을 지었다. 뒤에 나지막한 야산이 있어서 겨울에 부는 차가운 북서풍을 막을 수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