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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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바람아래해변 - 태안군 - 충남
먼 길 / 나태주 함께 가자먼 길너와 함께라면멀어도 가깝고아름답지 않아도아름다운 길나도 그 길 위에서나무가 되고너를 위해 착한바람이 되고 싶다.
2023.09.15 -
남당노을공원 - 홍성군 - 충남
역설 / 김용호 극과 극은 그렇게도 멀었고 극과 극은그렇게도 가까웠다. 언어의 파라독스를하나의 진리로서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을나는 불행으로 생각지 않는다 회오리바람이 뜨거운 정열을 몰아그를 껴안을 기회를 갖다주었어도이성의 차디찬 단념의 칼날은끝내 그이의 행복을 뺏지 않았다 그이의 행복이란 모든 것에 가난한 내 곁을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최후의 이 자리에서피끓는 심장의 고동을땅 위에 꽂았다 파랗게 질린 내 입술은 잠자리 날개처럼 떨렸으나다음의 말은아프게도 또렷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2023.09.11 -
해바라기 - 황새공원 - 예산
해바라기 / 류시화 시들지 않는 해바라기가 있다방 안 한쪽 구석에서말을 걸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조용하게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 울지도 웃지도 않지만욕하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는다헤어짐이 싫고 쓰라린 것이 싫다 내가 아무리 시들어 버려도늘 같은 곳에서 나를 지켜봐 주는 나의 해바라기가 있다 " 보고 싶다,다시 헤어지고 다시 쓰라려도...."
2023.09.10 -
풍경 - 꽃지해변 - 태안
바다에 갔다 / 정채봉 바다에 가서 울고 싶어결국 바다에 갔다눈물은 나오지 않았다할머니 치맛자락을꼭 붙들고 서 있는 것처럼그냥 하염없이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2023.09.10 -
바다 - 만리포해변 - 태안
바다를보면바다를닮고 / 신현림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멀어져서 아득하고 아름다운 너는흰 셔츠처럼 펄럭이지바람에 펄럭이는 것들을 보면가슴이 아파서내 눈 속의 새들이 아우성친다 너도 나를 그리워할까분홍빛 부드러운 네 손이 다가와돌려가는 추억의 영사기이토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구나 사라진 시간 사라진 사람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해를 보면 해를 닮고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2023.09.10 -
집 - 어사리노을공원 - 홍성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2023.09.10 -
돌탑 - 변산반도국립공원 - 부안군 - 전북
돌탑 / 고미숙 누구의 소원일까차곡차곡 쌓여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돌은불안한 소원이 되어가장 낮은 곳에 있는 돌은소원을 받쳐주는 소원이 되어탑을 이루고 있다 소원이 깃들어 있지 않는돌도 한 개 끼어 있다 돌의 마음이 무거울까봐아무런 소원 없이내가 올려놓은납작 돌 한 개
2023.09.09 -
미안해 잘못했어 용서해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2023.09.09 -
엽서를 태우다가 / 이외수
엽서를 태우다가 / 이외수 지난 밤 그대에게 보내려고 써 둔 엽서 아침에 다시 보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성냥불을 붙였다 끝까지 타지 않고 남은 글자들 외 로 움
2023.04.08 -
친구를 보내며 / 이백
靑山橫北郭白水遶東城此地一爲別孤蓬萬里征浮雲遊子意落日故人情揮手自자去蕭蕭班馬鳴 李白 청산횡북곽백수요동성차지일위별고봉만리정부운유자의낙일고인정휘수자자거소소반마명 이백 푸른 산은 성 북쪽에 비끼어 있고 흰 물은 성 동쪽을 싸고 흐른다 이 곳에서 한번 헤어지며는 쑥대같이 만리를 날리어 가리 뜬구름은 나그네의 마음인가 석양에 내 가슴은 한이 맺힌다 이제 손 흔들며 떠나려는가 가는 말도 쓸쓸한지 소리쳐 운다 이백
2023.03.12 -
목마와 숙녀 / 박인환
목마와 숙녀 / 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2023.03.12 -
Splendor in the Grass / William Wordsworth
Splendor in the Grass / William Wordsworth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2023.03.12 -
진눈깨비 / 기형도
진눈깨비 /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
2023.03.12 -
빈집 / 기형도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2023.03.12 -
입속의 검은 잎 /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
2023.03.12 -
질투는 나의 힘이다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이다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2023.03.12 -
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2023.03.05 -
행복 / 유치환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2023.03.05 -
한잎의 여자 / 오규원
한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詩集)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같은 슬픈 여자
2023.03.05 -
沙平驛(사평역)에서 / 곽재구
沙平驛(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
2023.03.02 -
쓴맛 / 천양희
쓴맛 / 천양희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잘 구별되지 않고나팔꽃과 메꽃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가 잘 구별되지 않고미모사와 신경초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개와 는개가 잘 구별되지 않고이슬비와 가랑비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가리와 두루미가 잘 구별되지 않고개와 늑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고잡념 없는 사람과 잡음 없는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평생을 바라 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럴까구별 없는 하늘에 물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쓴맛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지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대답처럼 떨어졌습니다
2023.02.16 -
패러독스(역설) / 김용호
패러독스(역설) / 김용호 *그리하여 내 사랑은 영원히 유폐(幽閉)의 운명을 등에 지고 뻗을 곳 없는 내 정열은 우울의 화석(化石)이 되고 말았다.* 극과 극은 그렇게도 멀었고 극과 극은 그렇게도 가까웠다 언어의 파라독스를 하나의 진리로서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불행으로 생각지 않는다 회오리바람이 뜨거운 정열을 몰아 그를 껴안을 기회를 갖다 주었어도 이성의 차디 찬 단념의 칼날은 끝내 그이의 행복을 뺏지 않았다 그이의 행복이란 모든 것에 가난한 내 앞을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최후의 이 자리에서 뒤끓는 심장의 고동을 땅 위에 꽂았다 새파랗게 질린 내 입술은 잠자리 날개처럼 떨렸으나 다음의 말은 뼈아프게 똑똑히 하였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2023.02.15 -
이정하의 '돌아가고 싶은날의 풍경중에서
이상한 일입니다. 사랑을 나눠 보면 슬픔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약간의 기쁨, 그 불확실한 기쁨을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전체가 슬픔에 젖어 산다 해도 능히 그것을 감수하거든요.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어이없는 일이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벌어질 것이니. 내게도 그런때가 있었습니다. 구석진 골방에 쳐박혀 죄없는 담배만 죽이던, 긴 밤 내내 전해 주지도 못할 사연들만 끼적이다 날이 뿌옇게 새던 그 시절, 그때 사랑은 결코 환희가 아니었습니다. 밝으면 밝을수록 비친 이면에 깊숙이 도사리고 있던 어둠이라고나 할까요. 당연히 달콤하고 황홀한 것이라고만 상상하던 나에게 사랑은 너무나 혹독한 시련으로 다가왔던 것이지요.
2023.02.06 -
사슴 - 북한산 - 서울
산이 좋아 산에서 잠든너 사슴아 순하디 순한 눈으로 고독의 등불을 켜들고 여름엔 녹음에 쉬고 가을은 마알간 하늘을 배우고 겨울엔 그토록 좋아하던 하얀 눈밭은 뛰어다니며 오래 오래 산에서 살아가렴
2023.01.29